📕 달콤한 나의 도시 / 정이현 지음
✏️ 그러나 이건, 이건 명백히 다르다. 늘 함께 어울려 다니던 친구가, 갑자기, 결혼을 선언한 것이다. 발 딛고 선 땅바닥이 흔들리는, 진저리 나도록 현실적인 날벼락이 아닐 수 없었다.
"미안해. 어쩌다보니 후다닥 그렇게 됐어."
제인의 말투에서는 어쩐지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미리 말을 못 해서 미안하다는 건지, 아니면 먼저 가서 미안하다는 건지 헷갈렸다.
✏️ 직장생활에서 가장 힘든 것은 단연코 인간관계다. 아침마다 악어가 우글대는 늪에 머리통을 집어넣는 기분이라며 징징댔던 적도 있다. 고생 끝에 만들어놓은 결과물을 살갑게 굴던 상사 손에 홀라당 뺏겨보기도 했고, 친구처럼 지내던 동료에게 남자 문제를 털어놓았더니 며칠 뒤 '연애박사 오은수 실연으로 자살 직전' 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소문이 온 사내를 휩쓸었던 적도 있었다. 이민정과 나는 특별히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는 관계였다. "쟤는 원래 싸가지가 없는 거니, 아님 나를 무시하는 거니?" 장 선배는 이렇게 구시렁거리곤 했다.
✏️ 그러고보니 며칠 전까지 '인생 뭐 있나' 이던 유희의 메신저 대화명이 어느새 '문제는 인생이 아니라 인생에 대한 용기다!!'로 바뀌어 있었다. 두 개 겹친 느낌표가 심상찮다. 무릇 메신저 대화명이란, 일상의 사건이나 심경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새로 써서 주변에 널리 알리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요즘 내 대화명인 '친절한 은수씨'는 사실의 반영일까, 이루고픈 소망일까, 아니면 교묘한 위장일까.
✏️ 그녀는 벌써 뮤지컬배우 지망생을 위한 아카데미에 등록했으며 곧 재즈댄스와 연기 레슨도 받을 거라고 했다. 나이는 좀 많은 편이지만 타고난 감각이 있고 상대적으로 풍부한 인생 경험도 있으니 이만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지 않겠느냐며 벅찬 희망을 늘어놓았다. 모니터 가득 펼쳐지는 유희의 옹골찬 계획을 나는 멍한 눈길로 좆았다. 재인의 결혼 발표를 들었을 때와는 또 다른, 둔하고 벙벙한 충격이 숨골을 내리눌렀다. 재인과 유희는 미친 게 아니다. 재인은 재인대로, 유희는 유희대로 자기만의 길을 쉼 없이 찾아가고 있는 거다. 오직 나만 조그만 웅덩이의 썩은 물처럼 이 자리에 멈춰 있다는 자괴감이 쉬이 가시지 않았다.
✏️ 오래된 친구 사이가 자꾸만 삐거더거대는 건, '잘난 척해봐야 나는 네 밑바닥을 다 안다' 는 오만한 자세로부터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 재인이 말한 '다른 세계' 란 결혼을 이르는 것이 분명하리라. 그녀는 마치 '선택받은 극소수 VIP 고객을 위한 특별 감사 세일 초대장'을 손에 쥔 양 말하고 있었다. 초대받지 못한 자의 자격지심이겠지만, 그래봤자 그 상점엔 팔다 남은 허접한 떨이 물건밖에 없을 거라고 괜스레 삐죽대고 싶어진다. 어차피 언젠가는 밝혀질 일을 끝끝내 털어놓지 않는 유희도 못마땅했다. 메신저에서는 그토록 용기백배 세계 일주 배낭여행을 떠나는 여대생처럼 굴더니,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온라인의 모습과 현실의 모습이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며칠 전 메신저에서 만난 유희와, 지금 내 눈앞에 앉아있는 유희는 어쩐지 서로 전혀 다른 인간인 듯 느껴졌다.
✏️ 유희의 신랄한 어조에서 '꼬여가기'를 바라는 은근한 기미가 풍겨왔다. 왠지 머리칼이 쭈볏 서는 기분이다. 유희의 주장이 아주 일리가 없는 것만은 아니라는 희미한 예감 때문일까.
"똘똘한 애니까 지가 알아서 잘하겠지."
나는 자신 없이 반박했다.
"혼자서 기를 쓰고 잘한다고 되냐, 구조가 낡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데."
"결혼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그렇다고 아예 안 할 순 없잖아."
✏️ 식당을 나와, 김영수와 나는 해 저문 거리를 말없이 걸었다. 그가 조금 앞서고 내가 뒤처져 걸었다. 그는 내 발걸음의 빠르기 따위는 아랑곳없이 제 속도대로 발을 움직였다. 내가 부지런히 따라가면 얼추 보폭을 맞출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기는 싫었다. 흔들리며 멀어져가는 그의 딱딱한 등은 내게 친밀감도 적의도 보이지 않는다. 대개의 행인이 다른 행인에 대하여 그런 것처럼.
✏️ 어제와 오늘이 별다르지 않았던 것처럼 오늘과 내일 사이에도 경천동지할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시간에는 매듭이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한하게 지속되는 그 반복성이 두려워 자꾸만 시간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구별 짓고 싶어 한다. 아아, 그렇게 해서라도 복잡한 현재를 깨끗이 털어버리고 맑은 새 날을 맞이할 수만 있다면.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맨발로 폴짝폴짝 뛰어 내일을 마중 나가겠다.
✏️ 우리는 왜 타인의 문제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판단하고 냉정하게 충고하면서, 자기 인생의 문제 앞에서는 갈피를 못 잡고 헤매기만 하는 걸까. 객관적 거리 조정이 불가능한 건 스스로를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차마 두렵기 때문인가.
✏️
"어, 그러셨어? 너 정리하는 동안에 나는 입 벌리고 너 기다리라고? 어디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안달복달 걱정하면서?"
"......정말 나를 걱정한 거였어요? 걱정하고 있다는 그 느낌이 싫었던 게 아니고?"
맥이 탁 풀렸다. 사랑이 저무는 느낌은 어떻게 오는가. 누군가와 이별할 순간이 도래하면 엉뚱하게도 오래전 운동회 때가 생각난다. 줄다리기 시합. 청군과 백군이 동아줄 하나를 마주 잡고 팽팽히 대립하고 있다. 그때 불현듯 한쪽에서 동아줄을 휙 놔버린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모든 것이 덧없다는 듯. 그럼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될까. 게임의 승자가 되겠지만 그걸 진짜 이겼다고 말할 수 있을까.
✏️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내 어릴 때의 꿈도 이렇게 지지한 사무원으로 늙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다고 딱히 특별한 꿈이 있었던 기억도 나지 않는다.꿈. 간절히 이루고 싶은 미래, 헤엄쳐 닿고 싶은 기슭. 사람들은 모두 다 한 가지씩의 꿈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듯하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태오, 뮤지컬배우가 되고 싶은 유희, 우거지 왕국을 세우겠다는 희망으로 부풀어 터질 것 같은 안이사도 있다. 꿈은, 인간을 생에 가뿐히 헌신하도록 만드는 기적의 동력처럼 보인다. 단 한 사람, 나의 경우를 빼면 말이다. 도무지 되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없이 내 청춘은 끝나가고 있었다.
✏️ "오늘, 뭐 했어?"
이렇게 묻는 당신. 당신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이 "밥은 먹었어?" 라거나 "요즘 감기 무섭더라" 따위의, 별 뜻 없는 안부 인사와 다를 바 없는 말이라는 것도 잘 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당신의 무심한 질문이 누군가에게는 순식간에 면도날로 턱을 베인 느낌일 수도 있음을 기억해달라는 것뿐이다. 이를테면 오늘 내가 한 일이 바로 이것이라고 당당히 밝히기 어려운 나 같은
✏️ 이 세상의 틈과 틈 사이를 요령껏 요리조리 피해 다니면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줄 알았어요. 어른이 되는 시간, 내 인생에 온전히 책임져야 하는 시간을 최대한 뒤로 미룰 수 있을 줄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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