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긍정성의 숭배는 고통울 개인에게 귀속시켜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게끔 만들고 사회를 탈연대화한다. 사람들은 점차 낮의 꿈, 미래의 꿈, 앞으로 도래할 것에 대해 사유하지 못하며 결속하지 못한다.
-7쪽
저자는 카뮈, 스피노자, 아렌트, 블로흐, 그리고 하이데거가 말한 ‘희망’의 개념을 비판한다. 희망이 의지적 행위의 반대인 수동적이고 단념적인 행위라는 주장 그리고 희망이 의지적 행위 그 자체라는 주장을 모두 반박한다. 그리고 희망의 관조적 차원을 강조한다. 먼 곳 초월적인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가능서의 영역이 바로 희망이라고 말하며 저자는 존재론적으로 불안이 아닌 희망의 연상학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불안은 유령처럼 사방에 존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팬데믹, 세계대전, 시후 재앙과 같은 종말론적 시나리오를 마주한다.
-14쪽
요란한 문제 해결과 위기관리법 앞에서 삶은 생존의 삶으로 축소된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생존사회는 마치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을 어떻게든 피해 보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는 병자와도 같다. 희망만이 살아남음을 넘어서는 살아 있음을 되찾게 해줄 것이다.
-15쪽
만연해진 불안의 분위기는 희망의 싹을 질식시킨다. 불안으로 인해 우울한 기분이 널리 확산된다. 불안과 르상티망은 대중을 우파 포퓰리즘으로 인도한다.그리고 혐오를 선동한다. 연대와 친절과 공감은 서서히 붕괴된다. 증가하는 불안과 커지는 르상티망은 사회 전체를 난폭하게 만든다. 그러다 종국에는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전 대통령은 퇴임 연설에서 이같이 말했따. “민주주의는 불안에 굴복하면 무너지게 됩니다.” 불안과 민주주의는 양립할 수 없다. 민주주의는 화해와 대화의 분위기 속에서 그 꽃을 피우기 대문이다. 자기 의견이 절대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타인의 이야기를 경청하지 않는 사람은 민주 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불안은 훌륭한 지배 도구다. 대중을 순종하게 하고, 공갈에 취약하게 만들기 떄문이다. 불안한 분위기에서는 자신의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없다. 이는 억압에 대한 불안감에서 기인한 것이다. 불안을 공공연히 부추기는 혐오 발언이나 이른바 쉿스톰은 자유로운 의견 표출을 가로막는다. 심지어 오늘날 우리는 사유에 대한 불안마저 가지고 있다. 사유할 용기가 사라져 가는 듯하다. 사유는 ‘완전히 다른 것’에 대한 접근을 가능케 한다. 그러나 불안의 분위기 속에서 같은것들끼리 순환한다. 대세 순응주의가 만연해진다. 불안은 ‘다른 것’으로의 접근을 차단한다. 다른 것은 ’동일한 것‘의 논리에 해당하는 효율성과 생산성의 논리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16쪽
’불안‘을 뜻하는 독일어 ’Angst'는 원래 ’궁지‘라는 뜻이었다. 불안은 확장 가능한 모든 폭과 관점을 질식시키며, 시야를 좁히고 차단한다. 그래서 불안한 사람은 궁지에 몰린 기분을 느낀다. 불안은 무언가에 사로잡혀 있거나 사방이 무언가로 둘러싸여 있다는 느낌을 수반한다. 불안에 빠진 사람의 눈에 이 세상은 감옥처럼 보일 뿐이다. 그에게 열린 공간으로 인도하는 문은 전부 닫혀 있다. 불안은 미래를 가로막고, 가능한 것과 새로운 것으로 향하는 통로를 차단해 버린다.
희망은 언어적으로도 불안의 반대말에 해당한다. 언어학자 프리드리히 클루게의 어원 사전에서는 ‘희망’을 ’앞으로 몸을 굽힘으로써 더 멀리, 더 정확히 보려고 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희망은 ’먼 것, 미래를 보는 것‘을 의미한다. 희망은 ’앞으로 도래할 것‘을 볼 시야를 열어준다. 독일어 ’Verhoffen'은 희망하다라는 뜻이다. 사냥에서 이 단어는 ‘가만히 선 채로 귀를 기울여 소리르 듣고, 낌새를 읽는다’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예컨대 노루가 이러한 행위를 한다고 볼 수 있다.희망하는 이는 주변을 샅샅이 파악한다. 즉, 방향을 정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가장 내면에 자리한 희망은 그야말로 깊은 절망 한가운데서 그 눈을 뜬다. 절망이 깊을수록 희망은 강렬하다.
디지털 커뮤니케이션은 사람들의 고립을 심화한다. 소셜미디어는 역설적으로 소셜한 것을 해체하여 결국 사회적 결속력을 약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결속되어있지는 않으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도 잘 연결되어 있다. 관계 맺기는 연락으로 대체된다. 거기에 접촉이란 없다. 우리는 접촉이 없는 사회에 살고 있다. 접촉과 달리 연락은 친밀함을 형성하지 못한다. 타자가 ‘너’에서 ‘그것‘, 즉 나의 필요를 충족시켜 주거나 나의 자아를 확인하는 목적에 지나지 않는 하나의 대상으로 전락할 때 타자와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그 힘을 잃고 약해진다. 반사된 나 자신을 보기 위한 역할만을 부여받은 타자는 그의 다름, 그의 타자성을 상실하게 된다. 연결과 접촉의 부재를 야기하는 사회의 늘어가는 자기애는 불안을 강화한다.
-34쪽
니체는 희망을 삶에 대한 단호한 긍정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정의한다. ”제우스는 인간이 다양한 불행을 만나며 고통받더라도 삶을 체념해 버리는 게 아니라 새로운 불행에 또다시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했다. 제우스는 그런 식으로 인간에게 희망을 부여했다.
-45쪽
희망은 능동적 정신을 지니고 있다. 희망의 정신은 인간의 행위에 생기를 불어넣고 고무시킨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활동적이고 강력하고 결단력 있는 희망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희망은 역설적이다. 희망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도 아니며, 실현 불가능한 상황을 억지로 실현해 보려는 비현실적인 의지도 아니다. 희망은 도약의 순간이 도래했을 때 도약하고자 웅크리고 있는 호랑이 같다. 희망한다는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것을 위해 매 순간 준비하고 있다는 것과 같다. (...) ㄱ강하게 희망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을 알리는 모든 전조를 인식하고 사랑한다는 듯이며, 새로 태어나려고 준비된 것을 실제로 태어나도록 돕기 위해 매 순간 준비된 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57쪽
밤의 꿈은 대부분 소원과 불안의 꿈이다.프로이트에 따르면 밤의 꿈의 기능은 과거에 겪은 트라우마적인 경험을 처리하는 것이다. 밤의 꿈에는 미래의 차원이 없다.
-68쪽
아렌트에 따르면 행위란 스스로 주도해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태어나 세상에 처음 등장하여 주도성을 가질 수 있고 새로운 것 제일 작동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인간 행위를 규정 하는 것은 철저한 우연성이다. 인간은 새로운 것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을 통제하거나 그것에 결과를 예측 하지는 못 한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어떠한 행위를 할 때 실제로는 뭐라고 있는지 알지 못 한다. 아르티에 따르면 인간은 어떠한 행위를 했을 때 그 행위로 인해 자신이 전혀 의도하지 않았구나 알아챌 수 없었던 결과가 발생한 것에 대해 자신의 탓이 있고 자신이 행한 일이 치명적이고 이기지 못한 결과를 초래 하더라도 절대 그 행위를 되돌릴 수 없다 라는 점에서 죄책감을 지게 된다. 그래서 인간은 본인의 행위에 따라 묻는 불가역성의 부담과 결과의 집 불가능에 성에 부담을 줘야 한다. 의미에 대한 피할 수 없는 이런 죄책과 관련해 아른 지는 용서의 계정을 도입 했다. 용사는 의미는 인권 행위의 대제 한 필요적죄 책을 사해 준다. 의미 행 한과의 결과로부터 서로를 자유롭게 해 주는 것이다. 아렌트는 용서를 행위로 인해 시작 되어 버린 흐름에 불 가역 성과 불 가능성 그리고 이미 한 행위를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치유 하는 치료 대로 삼았다 아렌트는 요절 할 수 있는 능력만이 우리로 하여금 자유로를 이루어 낼 힘과 새로 시작해 낼 힘의 보고가의 대단한 능력이면서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힘을 갖게 준다고 말했다. 그러나 용서 님이 벌어진 일로 거슬러 올라가 거기서 새로 시작할 여지를 만난다는 점에서 과거와 와, 관련된 행위다 하지만 인간은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다와 가면서 행위 한다. 용서가 해외의 미래 성이 초래 하는 우연성 까지 지급 포까지는 못한다. 게다가 변덕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인간 마음의 특성이 그러 하는 불확실성의 연계를 더욱 크게 만든다. 아르헨 지는 이런 미래 예측 불가능 성과 관련해 역 속에 개념을 도입 하였다. 약속은 불확실성의 바다에서 예측 가능한 것을 찾아 확실하고 명확한 동기가 둘러진 섬으로 만드는 일이다. 약속은 미래를 바친 현재처럼 다루어 그것을 처리 할 가능성을 우리에게 준다. 약속이 미래를 예측 가능한 처리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는 것이다. 아렌트는 니체가 말한 자신이 뱉은 말을 부류의 사고나 온 명이 맞서까지 지켜 낼 수 있을 정도로 본인은 강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 말이 당신 내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강해지는 힘과 자유에 대한 의식을 이용 하기도 했다. 과거는 용서를 통해서 미래는 약속을 통해서 다를 수 있다. 아렌트는 용서와 약속이 인간 행위 즉 기본 조건이라고 했다. 아렌트는 이 둘의 새롭지만 종결 될 수는 없는 흐름을 거슬러 다시 시작하고 풀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하는 일종의 제어기관과 같다고 말했다. 아른 차에 따르면 인간의 이미 행해진 일은 없던 일로 만드는 능력이나 자기로부터시작된 흐름을 통찰 할 능력이 없는 상태 행 하지 않고서는 필 멸의 생활을 지배하여 탄생의 순간 부터 숙명적으로 죽음을 하는 법칙에서 자유란 불가능하다. 폐쇄 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동적 인생에 흐름에서 멈춰 줄 수 있다. 새로 시작할 수 없다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이 처음 모든 것을 그저 반복 하며 죽음으로 네 달려갈 숙명에 처해 있을 뿐이다.
이건 음성 녹음으로 메모해놓고 수정을 안 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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