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읽는 뇌>의 저자인 프랑스인지 심리학자 스타니슬라스 드앤은 종이 위 점, 선과 선이 눈을 거쳐 인간 의식에 심상으로 떠오르고 의미로 이해되는 과정은 경이 그 자체” 라고 말한다 실제로 인간은 한눈에 단어를 이해한다고 생각하지만, 뇌는 글자 모양을 보고 의미를 곧바로 이해하는 게 아니다. 문자를 부분으로 쪼개고 그것을 다시 문자 음절 형태소 등에 위계로 재구성한다. 이 같은 분해와 재결합이 모두 자동으로,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다시 말해 읽기는 뇌신경 회로에 새로운 길을 내고 닦은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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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기계 파괴 혁명을 실제로 시도한 사람이 있었다. 시어도어 카진스키가 그 주인공이다. 유나바머란 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미국인은 1978년부터 1995년까지 16회에 걸친 우편물 폭탄 테러로 세 명을 살해하고 23명을 다치게 한 끝에 붙잡혔다. 체포되기 전 그의 요구 조건은 단 하나였다. 자신의 주장이 담긴 글에 유력 일간지에 실어 달라는 것이었다. 지금 같으면 트윗 한 번으로 족하겠지만 당시엔 사람들에게 뭔가 알리려면 신문 지면을 이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산업사회와 그 미래’라는 제목에 그 선언문은 실제로 1995년 9월 19일자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에 각각 실렸다. 35,000개의 단어로 된 긴 선언문의 요지는 이랬다 “기술은 사회를 불안정하게, 삶을 무의미하게 만들었으며 광범위한 심리적 고통을 초래했다. 기술의 진보로 인해 대부분의 사람은 주어진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대리 만족'에만 몰두하며 시간을 보낼 뿐 자기 주도적 활동과 만족은 얻을 수 없게 됐다. 기술 진보는 결국 광범위한 인간 유전 공학으로 이어질 것이며 인간은 사회 시스템에 지배자가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조정되는 노예로 전락할 것이다. 이런 체제가 거대해질수록 그 붕괴로 인한 결과는 더욱 참혹할 것이다. 어차피 붕괴될 거라면 빠를수록 좋다.” 카진스키는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24세의 UCC 버클리 대학에 최연소 수학 교수가 된 천재였다. 그의 글이 당대 지식인 사이에서 화제가 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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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한 외도만 중시하는 도덕은 맹목이다. 윤리에서도 행위의 결과와 효과는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결과와 득실을 따지지 않는 선의가 삶의 절박한 순간을 지탱하는 경우가 우리 삶에는 얼마나 많은가. 주위의 불우한 이웃에게 몇 푼 적선하는 것은 그들 삶의 전체적 개선 효과로 봤을 때 하찮을지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든 큰돈을 번 자산가가 보란 듯 거액을 내는 것을 더 가치 있는 선행으로 우대한다면 그것은 '제왕적 이타주의'라 불러야 옳다. 그런 사회가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한 공동체일지는 의문이다. 최대 다수의 선을 추구하더라도 사람들 사이의 오가는 사소한 선의와 보답에 대한 시선 또한 놓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을 배우려면 긴 호흡의 책, 특히 문학 작품을 천천히 읽으며 책 속의 미로에서 길도 잃어 보고 쉽게 계량되지 않는 고통에 공감도 하고, 득실 계산만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번민도 느끼는 훈련을 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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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책을 읽을 때 나타나는 진리란 다른 사람(저자나 다른 누구)으로부터 전수 받는 것이 아니라 읽는 사람 스스로 창조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책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을 책에 던진다. 그때부터 궁리가 시작된다. 독서의 역할은 우리를 생각의 길로 들어서는 입구의 '딱 문턱까지만' 인도하는 것이다. 프루스트는 마치 지금 스크린에 빠진 현대인을 예견이나 한 듯, 자신의 정신을 가동하지 않고 자기 밖의 것에 의지해 수동적인 삶을 사는 사람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지금의 상황을 예견이라도 한 것 같아, 길지만 그대로 인용하겠다. "외부에 도움이 없는 경우, 그들은 자신을 영원히 망각한 채 피상적 삶의 머무르게 된다. 그러면서 온갖 쾌락의 장난감이 되어 주위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주변의 수준에 맞추는 수동적인 삶을 살게 된다. 피상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그들이 가진 고결한 정신을 깡그리 잃고 결국에는 그것에 대한 기억조차 잊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할 힘과 창조할 능력을 되찾으려면 외부 충동이 작용하여 반강제적으로 그들을 능동적인 정신세계로 인도해야만 한다. (......) 이때 필요한 것은 외부에서 오는, 그러나 그 작용 자체는 우리 내면에서 이루어지는 개입이다. 말하자면 이때 충동은 외부, 즉 우리가 아닌 다른 데서 오지만 그 개입 행위 자체는 완전한 고독 속, 즉 홀로 있는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잠들어 있는 정신을 깨우는 것은 외부에서 와야 하지만 자기 정신의 되찾는 일은 고독 속에서만 가능하다. 자기 내면을 여는 일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독서는 정신의 가동을 동료 하는 자극으로만 작용할 뿐, 결고 우리 자신의 정신 활동을 대체할 수는 없다. 만약에 정신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걸 넘어서 개인의 삶 자체를 대신한다면 독서는 오히려 위험천만한 일이 된다. 프루스트는 이처럼 독서를 '고독 속의 대화'로 제정함으로써 그의 형태로 박제화할 수 있는 지식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우려를 불식하는 한편, 읽기가 인간 정신을 가져다준 무한한 이점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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